"취업준비생들에게 스펙이란 학력과 학점, 어학성적, 해외연수, 자격증, 인턴경험, 심지어 나이 등을 말한다. 요즘 기업들이 채용의 변화혁신을 말하며 스펙파괴를 한다고 한다. 그래놓고 경험을 위주로, 열정을 위주로, 다양한 체험활동, 공모전이나 오디션 입상을 본다. 대학 졸업을 앞둔 사람에게 이것부터가 엄청난 스펙을 요구한다고는 생각 안하는가. 학력, 학점제한 폐지? 여전히 다보고 있지 않은가. 대기업이 말하는 '스펙타파'에서의 스펙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도대체 뭘 파괴하고 혁신했다는 건가?"
150만 명의 취업준비생(취준생)이 가입한 포털의 한 카페에 올라온 글이다. 9월 본격적인 하반기 채용이 시작됐다. 이번 하반기 채용에서 어학점수, 학력 등 기존 스펙을 탈피한 전형을 하겠다는 기업들이 늘고 있지만 정작 취준생들은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다.
구직자 10명 중 4명 "스펙 불문 채용이 오히려 불리"
취업포털 '사람인'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구직자 10명 중 4명은 스펙을 따지지 않는 채용추세가 자신의 취업에 오히려 더 불리할 것으로 여긴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사람인이 구직자 74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317명(42.4%)이 스펙을 초월한 채용이 취업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답했다고 11일 밝혔다.
그 이유로는 '어차피 기본 스펙을 갖춰야 할 것 같아서'(53%·복수응답), '무엇을 위주로 준비해야 할지 막막해서'(38.8%), '외향적인 일부에게만 유리할 것 같아서'(36%), '공정한 경쟁이 어려울 것 같아서'(32.2%) 등을 꼽았다.
올 하반기는 기업들의 채용 인원이 줄어 취업난이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30대 그룹의 채용 규모는 6만2000여 명. 작년 하반기(6만3300명)보다 감소했다. 또한 30개 공기업의 올 하반기 정규직 신규 채용 규모도 약 1200명으로 지난해 1641명보다 약 26% 감소했다.
취업난 속 일부 기업들이 길거리 캐스팅이나 오디션, 자기 PR대회 등을 도입해 채용에 변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취준생들은 오히려 시큰둥하다.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봤다.
'탈(脫)'또는 '무(無)'스펙전형, 소수 기업만이 서류통과용으로만...
서울 Y대에 재학중인 김아무개(27)씨는 "주위에 탈스펙 전형을 신경 쓰는 준비생들을 본 적 없다"고 말한다. 김씨는 "서류를 20~30개 이상 쓰는데 무스펙전형을 하는 몇 기업 때문에 기존의 스펙 쌓기를 안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 기업에서 하는 오디션 등 전형은 서류통과에만 한정되어 있다"며 "결국 면접에 가서 고스펙자들이 합격하는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그는 "최종면접에서 면접관들이 토익만점자에게 관심을 보였다"며 "결국 그 친구가 최종 합격했다"며 최종면접에서 스펙이 주요한 요소임을 몸소 느꼈다고 말했다.
이번 하반기 공채에서 기아자동차는 대졸공채와 인턴 채용의 서류전형에서 일정 비율을 스펙과 무관하게 자기소개서만으로 선발하는 '커리어투어'를 실시했다. 하지만 이 또한 서류심사에서만 스펙이 배제됐을 뿐이다.
IBK기업은행도 하반기 신입행원 채용을 13일 마감했다. 이때 학력이나 연령 등 지원 자격에 제한이 없는 열린 채용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지원자들의 열정과 도전정신을 보고 채용하는 '당신을 보여주세요!'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4분간 자신의 강점과 잠재력 등을 자유롭게 홍보하는 것이다. 이 또한 합격자에게는 이번 채용에서 서류전형 우대 혜택이 주어지는 데 그친다.
탈스펙 전형은 기준 모호... 입상 경험 등 결국 '또 다른 스펙 경쟁'
서울의 S대에 재학 중인 이아무개(26)씨는 "무스펙 전형은 뭘 보겠는지 모르겠다"며 "오히려 무스펙이면 대외 활동이나 공모전 수상을 해야 했기에 더 골치 아파진다"고 토로했다. 이씨는 "요즘은 자소서에서 열정을 본다며 동아리, 해외연수, 입상경험들을 묻는데 기존 스펙보다 더 채우기 힘든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오디션 같은 무스펙 전형이 자꾸 생겨서 고민된다"며 "기존 수치화된 스펙준비에 주관적인 스펙까지 준비해야 할 판"이라고 비판했다.
대구의 K대에 재학 중인 안아무개(27)씨는 "지방대 학생들에게 무스펙 전형은 더 달갑지 않다"고 말한다. 안씨는 "사실 학생경험이라는 게 뻔하고 특히 지방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경험면에서 더 내세우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그는 "파워블로거로 백만 명 이상씩 사람을 모은다면 모를까 대학생들에게 열정은 결국 수치화된 수상, 공모전 경험일 뿐"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오히려 요즘 스펙 대신 다른 요소를 본다는 기업이 늘자 제 2외국어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어 안씨는 "인문상경계열은 제2외국어라도 강점이 있어야 면접에서 낫다는 소릴 들어서 최근 중국어 과외를 받는다"고 말했다.
스펙 무관 평가한다고 해놓고 '어학점수, 동아리 경력 기재란 존재'
서울 Y대를 졸업한 김아무개(28)씨는 무스펙채용 추세는 기존의 스펙중심 채용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얼마 전 S기업 하반기 채용 때도 스펙과 무관하게 심사하겠다고 했지만 이력서상에는 영어나 동아리 경력 등을 이전처럼 모두 기재하게 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결국 어학이나 자격증 등의 스펙을 포기하긴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기업들이 채용방식을 살짝 바꿔서는 지금 청년 실업난을 해결할 수 없다"며 이미 너무 많은 구직자들이 밀려있다고 호소했다. 그는 "변화도 없는 탈스펙, 무스펙 채용보다는 채용 자체를 늘리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취업준비생들을 위한 포털의 카페에는 기업들의 '탈스펙' 채용을 우려하는 의견들이 많다. 누리꾼 A씨는 "말만 스펙파괴지 막상 스펙 없는 서류 받으면 그들이 통과시킬까요?"라고 말했다. 누리꾼 B씨는 "스펙도 쌓아야 하고 스토리도 쌓아야 하고 이중부담. 그냥 새로운 정책이나 더 이상 안 나왔으면"이라고 심경을 밝혔다.
오마이뉴스 김지혜 기자 |